일벌이 약속했던 이튿날이 되었다. 그러나 일벌은 나타나지 않았다."결국 나타나지 않는 걸까? 벌써 이틀째야. 내일이면 이 비늘마저 없어져 버려……. 이건 모두 나 때문이야…….”
“아니야, 승우야. 이건, 누구의 책임도 아니야. 너도 나도 정령들도 마을 사람들도 선녀들도 모두…… 모두가 다, 선녀와 나무꾼을 사랑했기 때문이야.”
“너무 어려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때 일벌이 나타났다. 그를 따라 무려 한 시간을 걸어 들어가서야 나무에 매달려 있는 벌집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갑자기 벌집에서 벌떼들이 달려나와 승우의 몸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선녀 설희가 손을 쓰기엔 속수무책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승우에게 손대면 정말 너희도 너희의 여왕벌도 무사하지 못해.”
“너야말로 우리 여왕님에게 손대면 너도 이 아이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그때 벌집에서 푸른빛을 내며 무엇인가가 선녀 설희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승우를 에워싸고 있던 벌들 중 일부가 날아와 그 빛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분명 여왕벌 정령이었다.
“안 됩니다, 여왕님. 스스로 나오시다니요.”
“이게 무슨 짓들이냐? 나는 이제야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게 되어서 그 어느 때보다도 기쁘거늘……. 어리석은 짓 하지 말고 어서 빨리 그에게서 떨어져라.”
벌들의 움직임이 산만해지기 시작했다. 어찌할 줄 몰라 하는 것이었다.
“선녀님 죄송합니다. 원하시는 꿀은 바로 저입니다. 저를 물고기 정령의 비늘 위에 올려놓으시면 제 몸이 꿀처럼 녹아 빛을 만들어내고 그 빛이 비늘과 날개옷을 붙여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을 것입니다. 자, 저를 데려가십시오.”
승우는 울고 있었다. 벌들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물고기 정령도 여왕벌 정령도 서슴없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저 이 모든 게 다 자신 때문인 것만 같았다.
“나는 너희의 여왕을 데려갈 거야. 이제 선녀와 나무꾼을 생각하는 마음이 엇갈리지 않도록, 너희 여왕의 희생과 모두의 마음이 하나로 모일 수 있도록 내가 마지막으로 힘을 낼 테니까 부디 나를 믿어줘.”
선녀 설희가 두 손 안에 여왕벌을 넣고 날아가지 않게 살짝 가둔 다음 눈을 감고 다시금 주문을 외우듯 입술을 움직인다. 그리고 두 손을 살짝 열어 보이자 푸른빛과 하얀 꽃잎이 한 줄기로 섞이어 벌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모든 벌들이 그 빛을 따라서 벌집으로 들어갔다. 승우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벌들이 ‘고맙다’고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나도 널…… 잊지 않을게!”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승우는 선녀 설희를 처음 만났던 곳으로 함께 돌아와 있다. 선녀 설희는 곧 하늘로 돌아갈 것이고 잠들어 있는 우진이는 깨어날 것이고 마을에 재앙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승우의 몸에 남아 있는 나무꾼의 마지막 영혼의 빛도 사라질 것이다. 더는 선녀와 나무꾼은 엇갈리지 않을 것이다. 달은 구름에 가리어 빛이 흐려져 있었다. 승우는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마치 꿈만 같다.
“곧 의식이 시작될 거야. 의식이 끝나는 대로 나는 사라져버려. 그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줘.”
“그게…… 너에게 정말 미안했고…….”
“미안해할 필요 없어. 승우 네가 이곳에 온 이유는 나무꾼의 영혼의 빛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잖아. 그리고 너와 우진이의 일은 내가 돌아가서 잘 말해둘 테니 너무 염려 마. 그리고 또?”
“그게…… 그러니까…….”
승우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지?”
“더 이상 이곳에 올 수는 없을 거야. 마지막 꽃잎들이 이 마을에 사는 마지막 사람까지 지켜줄 테니까. 내가 할 일이 없어.”
“왜 할 일이 없어! 나를 만나러 오면 되잖아!”
짧은 시간이었지만 승우는 선녀 설희가 너무나 좋았다. 더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더 많이 웃게 해주고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선녀 설희가 사는 곳이 어떤 세상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사는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마을이 이렇게 아름다운 이유가 선녀의 마음씨 덕분이라니 더더욱 보여주고 알려주어야만 할 것들이 많았다.
“그러면 내가 물을게. 승우야, 나와 함께 내가 사는 세상으로 가지 않을래?”
그제야 승우는 눈물을 그쳤다. 그리고 선녀 설희의 눈가에 맺혀 있는 눈물을 보았다. 당장이라도 그런 설희의 손을 꼭 잡고 따라나서고 싶었지만, 나무꾼이 그랬던 것처럼 승우에게는 지키고 싶은 가족이 있었다. 그리고 친구가 있었다. 선녀가 실제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유일한 친구가 떠나버리면 우진이는 얼마나 슬퍼할까?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승우야, 난 말이야. 소중한 것이 ‘하나’일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어. 하나만 선택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게 되었고. 그리고 그것이 단 하나일지라도 소중한 마음이 클수록 지키기 힘들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그건 정말 슬픈 일이야. 지금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 마음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다는 걸 승우 네가 알려주었어. 너와 함께 할 순 없지만 너의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주어서 정말 고마워! 널 잊지 않을게!”
선녀 설희가 날개옷 위에 정령들이 나눠준 마음을 올려놓자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너무나 따뜻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은 따뜻함이었다. 그 마음의 빛을 입은 선녀 설희가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몸짓으로 무언가를 그리자 그 빛이 마을을 뒤덮으면서 이내 하얀 꽃잎이 함박눈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승우의 몸에서도 한 줄기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선녀 설희가 내리게 한 하얀 꽃잎의 눈에 섞여 마을에 함께 내렸다.
그 한여름의 새하얀 눈꽃 잎은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그것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오로지 승우뿐이었다. 승우는 사라져가는 설희를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나도 널…… 잊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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