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원 마을을 거쳐 학평(鶴坪)이라고 부르는 들판을 지나가니 곧 구암리다. 본래 전주군 우동면에 속했는데 뒷산에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거북바위’ 또는 ‘구암’, ‘구복’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구암리 북쪽에 있는 ‘통샘’이라고도 부르는 통정 마을은 옛날에 통으로 짠 우물인 통정(桶井)이 있었다고 한다.
길은 계속해서 익산시 왕궁면과 완주군 봉동읍의 경계선을 따라 이어지고 있다. 한참 북쪽으로 걸어가자 봉동읍 장구리 역기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역터’ 또는 ‘신정’이라도 부르는데 그 북쪽에 신기 마을이 있고 거기서 좀더 가면 전강 마을이다. 마을 앞에 내가 흐르기 때문에 ‘전강(前江)’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쑥 고개를 넘으면 여산이고 여산에서 연무대에 이르면 옛 시절 신구전라관찰사가 직인을 교환하며 임무를 교대하던 황화정이다.
은진을 지나고 노성을 거치면 공주의 경천역이고, 공주의 장깃대 나루를 건너면 정안에 닿고 차령이 멀지 않다.
공주에서 차령을 넘으면 천안이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190m의 차령고개, 『산경표(山經表)』에 표시된 금북정맥(錦北正脈)이다. 고개 아래쪽으로 천안시 광덕면 원덕리 원터 마을을 찾아 내려가는데 길을 잘못 들었는지 풀숲이 연이어 앞을 가로막는다. 이리저리 헤치고 나와서 보니 신발이 흠뻑 젖어 있다.
원덕리에서 가장 큰 원터 마을은 조선시대에 원기원(院基院)이 있었던 곳인데, 그 마을 끝 집에서 한말의 개혁사상가인 김옥균이 여섯 살까지 살았다고 한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고 평택. 오산을 거쳐 수원에 이르고 지지대 고개를 넘으면 의왕시다. 의왕에서 과천을 지나면 남태령이다.
남태령 넘어 동작진을 건너면 서울
여우고개 또는 호현(狐峴)이라고도 부르는 남태령(南泰嶺)이 있다. 과천에서 서울시 관악구의 남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서울 남쪽에서는 제법 높았다. 그 때문에 여러 가지 전설이 서려 있기도 하는데, 그 하나가 강감찬 장군의 이야기로 그의 아버지가 이 고개에서 여자로 변신한 백여우를 만나 강감찬을 낳았다는 전설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옛날 이곳에 천년 묵은 여우가 있어 사람으로 변신한 다음, 소의 탈을 만들어 사람에게 씌워서 소가 되게 했다는 전설이다.
그 외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정조가 이 남태령을 지나가다가 한 노인을 만나 이 고개이름을 물었는데 그 노인은 여우고개임을 알면서도 얼떨결에 ‘남태령’이라 말했다. 그러자 진작에 고개 이름을 알고 있던 정조가, 왕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하면서 크게 노한 체 했다. 이에 겁이 난 노인은 임금에게 “제가 상스럽게 여우고개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남쪽으로 향하는 큰 고개라는 뜻으로 남태령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는데, 그 뜻을 가상히 여긴 임금은 그 노인에게 벼슬과 상을 내렸다고 한다.
사당을 지나면 이수역이고 바로 그곳에 동작진이 있었다. ‘동재기 나루’라고 불리는 동작진(銅雀津)은 조선시대에 서울과 수원 이남의 지방을 연결하던 3대 나루터중의 하나로 조선시대에는 병선(兵船)이 배치되어 있었다.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 보면, 임금이 경기감사 노공필(盧公弼)에게 “한강의 삼전(三田), 노량(鷺梁), 양화도(楊花渡) 등의 사공들이 관선(官船)은 숨겨두고 사선(私船)으로 건너게 하여 선가(船價)를 너무 비싸게 받으므로 길가는 사람이 진작 건너지 못하고 강가에서 노숙하는 사람이 많으니, 경은 그것을 엄중히 고찰하여 길가는 사람들에게 강 건너는 불편을 주지 말라”고 명을 내려 나그네들의 불편을 덜어주게 한 내용이 있다. 연산군이라 하여 못된 짓만 했던 것은 아닌가 보다.
영조 때 이인좌(李仁佐)가 반란을 일으킨 뒤에는 이 동작나루로 죄인들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그 이듬해부터 별장을 배치해 임검(臨檢)을 실시했다. 1746년부터는 노량진에 배치되어 있던 관선 15척 중 3척을 이곳에 배치해서 무료로 지나는 길손들을 실어 나르는 대신 임검을 하도록 하였다. 이어 1785년(정조9)에는 “한강과 노량나루의 관선은 10척, 서빙고와 동작나루에 5척을 배치한다”고 하여 백성들의 통행에 편의를 주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고 한다. 즉, 무료로 건네주도록 되어 있는 관선들마저 관선을 감춰두고 운행을 기피하면서 민간의 사선들이 비싼 도강료(渡江料)를 받았기 때문에 가난한 나그네들이 골탕을 먹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곳 동작진은 1857년 철종임금이 지금의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인릉(仁陵)참배를 위해 배다리를 놓았던 곳이기도 하다.
남대문이 삼남대로의 종점이다.
서울역을 지나 숭례문(崇禮門)에 이른다. 도성(都城)의 4대문과 4소문 중에 남쪽으로 나 있는 정문(正門)으로서 조선 태조 7년에 창건된 숭례문은 1448년(세종30)에 재건되었다. 당시 재건하려 있던 이유가 『세종실록』 15년 조에 실려 있다.
“경복궁의 오른 팔이 대체로 산세가 낮고 미약하여 멀리 헤벌어지게 트여서 품으로 껴안은 형국이 없으므로 남대문밖에 연못을 파고 문안에 지천사(支天寺)를 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남대문터가 지금같이 낮고 평평한 것은 필시 당초에 그 땅을 낮추어서 평평하게 한 것으로 여겨지는 만큼 이제 그 땅을 다시 돋우어서 양편의 산맥(山脈)과 잇닿게 한 다음 그 위에 문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는가?” 또 “청파역(靑坡驛)에서부터 남산으로 잇닿은 여러 산맥의 봉우리와 흥천사(興天寺) 북쪽의 봉우리에도 소나무를 심어 무성하게 가꾸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임금께서 말씀하시니 여러 신하들이 좋다고 하였다.
이수광(李晬光)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숭례문의 현판 글씨를 세종대왕의 큰 형님인 양녕대군이 썼다고 했는데, 그 글씨를 특히 좋아했던 사람이 바로 천하의 명필이라고 알려져 있는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라고 한다. 그가 과천에서 오고 갈 때면 항상 이 문 앞에서 황홀해하면서 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현판의 글씨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는 것이다.
숭례문이라고 부르는 남대문에서 삼남대로는 마무리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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