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향기2011/11/01 14:09

시골에서의 밤은 빨리 온다. 저녁 8시만 넘어도 마을을 드나드는 사람은 없어지고, 차 소리는 자취를 감춘다.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도 어둠을 채 밀어내지 못하고, 달빛만 고요한 밤이 찾아온다.

여느 마을처럼, 비비정마을의 밤 풍경도 얼마 전까지 그러했다. 이제는 비비정마을의 밤을 음악소리가 채우기 시작했다. 아직 달콤한 멜로디와 듣기 좋은 목소리는 아니다. 빈 하늘을 채우는 드럼 소리는 쿵쿵쿵쿵 네 박자를 겨우 따라가고, 멜로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삐삐삐 낯선 아코디언 소리가 밤공기를 덥힌다. 구성진 노랫가락은 흥겨움에 덩실덩실 어깨춤이 절로 나지만, 아직 노래반주기를 따라 가기에도 바쁘다. 그러나 시작은 반이고, 그들은 이미 어려운 길의 반을 건너왔다.

비비정마을의 밤은 아름답다

8월 10일 수요일 저녁 8시를 넘긴 비비정마을. 한 여름 길어진 해도 사위어가고, 금세 마을은 어두워졌다. 어두워진 마을 곳곳은 음악수업을 위한 강의실로 변한다.

마을 전체를 강의실 삼아 음악에 빠져있는 이들은 비비정의 마을밴드 ‘화백밴드’와 마을그룹 ‘건달시스터즈’다. 이들은 지난 7월부터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농사일에, 마을만들기까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이들이 악기와 마이크까지 손에 쥔 것은 단순히 악기를 잘 연주하고,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함이 아니다. 이들은 음악을 통한 소통을 꿈꾸고 있다. 음악소리가 담장을 넘고, 마을의 경계를 넘어 만들어낼 이웃 간의 즐거운 소통. 음악을 통해 보여주는 마을의 옛 모습과 앞으로의 이야기들. 그래서 이들은 밴드와 그룹을 결성하고, 더운 여름 땀 뻘뻘 흘려가며, 음악을 한다.

이들의 음악교육은 ‘기린봉악단’이 맡았다. 기린봉악단은 전주에서 연극, 악극, 뮤지컬 작곡가로 활동하는 봉춘설 단장과 대중음악과 클래식을 전공한 젊은 연주자들이 만나 귀에 익은 근현대사의 애창곡들을 공연하는, 자칭 타칭 “못말리는 풍각쟁이”들이다.

노래를 배우는 건달시스터즈나 악기를 배우는 화백밴드나 학생들의 평균 연령은 60을 넘겼지만, 그들의 선생님은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자식뻘의 젊은이들이다.

# 장면 3. 손도 쥐나고, 머리도 쥐나고


“손잡는 것부터 어렵더라고. 이렇게 손을 꺾어서 쥐어야하니 손에 쥐나. 악보를 손으로 옮겨내는 것은 더 어렵고.”
밴드에 악기 중 어느 것 하나 돋보이지 않는 게 없지만, 둘째가라면 서러울 베이스는 박시문 이장의 악기다. 다른 때라면 눈을 거두지 못했을 한일전 축구경기가 TV에서 중계되고 있지만, 박시문 이장은 “맞는가 봐봐. 그러니까 여기서 왼손을 놓고, 오른손으로 이렇게 잡는 거지?”라며 연신 선생님에게 질문하기에 바쁘다.

베이스 선생님은 기린봉악단의 베이스주자 안형호씨다. 다른 선생들과 마찬가지로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젊은 그는 수줍게, 그러나 주저 없이 늦깎이 학생을 가르친다. 박시문 이장은 질문이 많은 열정적인 학생이다. 지난 수업 이후 백지에 혼자 줄판을 직접 그려가며 베이스 연습을 했다니, 배움의 어려움을 열정으로 극복하고 있다.

# 장면 2. 하나, 하나, 하나

“하나, 쿵”, “하나, 쿵”. 귀로만 듣자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이곳은 드럼 연습실이다. 김영두 위원장은 더운 날씨에 문까지 열어젖히고 모기에게 몸을 내맡긴 채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그는 비비정마을 신문화공간조성사업의 추진위원장이지만 이날은 최은석 드러머에게 드럼을 배우는 학생이다.

세 번째 수업, 4분 음표를 하나씩 귀로, 손으로 익혀나가고 있는 중이다. 이제 겨우 구령에 맞춰 하나씩 치는 수준이니 언제 음악이 될까 싶지만, 2시간 분량의 수업량을 1시간을 갓 넘겨 끝내갈 만큼 배우는 속도가 빠르다.

하지만 김영두 위원장은 “어렵다”며 손을 내두른다.

“멜로디를 내는 건 어려울 것 같고 그냥 때리기만 하는 거라서 제일 쉽겠다는 생각에 드럼을 하겠다고 했는데, 너무 어려워.”

그는 어렵다면서도 인터뷰하는 중에도 눈은 악보를 보고, 손으로는 박자를 센다.


# 장면 3. 한 지붕, 두 연습실

마을 초입, 비비힐사업추진단 사무실은 두 공간으로 나뉘어 각각 아코디언과 기타 수업이 한창이다. 기타는 김광진씨와 김고은씨가 함께 배운다. 김광진씨는 비비정 청년회 멤버이고, 김고은씨는 드럼을 배우고 있는 김영두 위원장의 따님으로 밴드의 젊은 피다.

김고은씨는 “원래 기타를 배우고 싶었는데, 밴드를 만든다고 해서 바로 하고 싶다고 말했죠. 동네 어르신들하고 잘 지내는 편이긴 했지만, 이런 기회에 같이 밴드를 하면서 인사도 나누고 거리감도 줄일 수 있으니 더 좋은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봉춘설 기린봉악단 단장은 리드기타 김광진씨의 손을 하나하나 옮겨가며 기타를 가르치고 있다. 코드를 익히며 하나씩 튕기는 기타소리가 더듬더듬 멜로디를 찾아간다.

“어려워요. 손도 안돌아가고, 초보에서 발을 떼고 있으니 이제 열심히 해야죠. 어차피 손댔으니,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죠.”

다른 모든 학생들처럼 김광진씨도 “어렵다”며 말문을 열었지만, 역시나 다른 모든 학생들처럼 “잘 해야지”라는 다짐으로 말을 끝낸다.

사무실 안쪽에서는 장희서씨가 젊은 여선생 유하나씨의 지도에 맞춰 아코디언을 배우고 있다. 장희서씨는 악기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젊은 시절부터 아코디언을 배우고 싶어 했던 그는 몇 십 년 전 중동에 근로자로 나갔을 때, 처음으로 아코디언을 구입해 연습했다. 객지에서 혼자 한 아코디언 연습이 쉬울 리 없을 터. 게다가 귀국하면서 그 악기마저 놓고 와 아코디언에 대한 아쉬움을 품고 살다가 이번 기회에 다시 아코디언을 배우게 됐다. 그가 연습하고 있는 아코디언도 환갑 때 자식들에게 선물 받아 모셔둔 귀한 물건이다.

“어려서부터 아코디언 소리가 듣기가 좋아. 그렇게 배우고 싶었는데 혼자서 연습하니 되질 않더라고. 이번 기회에 배우게 돼서 좋긴 좋은데, 너무 어려워. 음을 완전히 익혀야하는데 자꾸 잊어버려.”
그가 그렇게 좋아하는 아코디언 연주를 본인이 직접 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 장면 4. 얼씨구, 좋다좋아!


가장 신나는 수업은 마을회관에서 열리는 건달시스터즈의 노래수업이다. ‘자옥아’에서 ‘별난사람’, ‘짠짜라’ 등 건달할머니들이 좋아하는 트로트 메들리에, 음반까지 취입한 가수가 흥을 돋우니 어깨는 덩실덩실하고, “아이고 좋아” 추임새도 절로 나온다.

이날은 원래 수업을 담당하던 송명옥씨가 영국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출전하면서, 전문노래강사 문영희씨의 도움을 받아 진행했다. 이날의 노래수업은 재미난 놀이다. 문영희씨는 배꼽 잡게 하는 농담과 노래 중간중간, 본 가사인 “자옥아”를 “영희야”로 바꾸는 센스로 건달할머니들에게 노래의 즐거움을 알려주었다. 배움의 처음은 즐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웃고 즐기는 사이 어렵지 않게 조금씩 노래의 힘을 깨워간다.

“저녁밥 먹은 거 꺼지게 하고 가게요.”라는 선생님의 말은 현실이 됐다. 두 시간동안 수업에 참여한 이영이, 정도순, 최순덕, 황옥순, 한순자 할머니는 율동까지 곁들여가며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음악에 빠지다, 사람에 빠지다

  화백밴드와 건달시스터즈의 시작은 “함께 즐기며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됐다. 마을만들기는 팀워크이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 나서더라도 주민 전체가 따라주지 않는다면, 이는 실패다. 마을만들기의 궁극적인 목적은 외부 관광객이 보기 좋은 마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민 전체가 살기 좋은 행복한 마을을 만드는데 있기 때문이다.

비비정마을도 마찬가지다. 신문화공간조성사업에 따른 농가레스토랑 신축과 운영은, 겉으로 드러난 하나의 사업에 불과하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민간의 팀워크를 바탕으로, 그들 스스로 행복을 찾아 다양한 활동을 펼쳐나갈 수 있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같이’의 가치를 알려주는 일이다.

그래서 비비정에서는 주민 모두가 공동텃밭을 가꾸고, 함께 작물을 재배한다. 그 길에 노래하는 건달할머니들 건달시스터즈와 중후한 매력의 화백밴드가 있다. 이들은 그 멋진 이름에 걸맞게 음악으로 하나되는 마을의 초석을 닦고 있다. 리드기타의 선율에, 다른 악기들이 음을 보태어 음색을 풍부하게 하고, 여기에 노래가 얹히면 멋진 하모니가 완성되듯 마을 사람들은 음악을 통해 조화와 균형을 몸으로, 마음으로 익혀가는 중이다.

지난 7월부터 수업을 시작해 이제 막 걸음마를 떼었지만, 곧 드럼은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기타와 어우러져 멋진 하모니를 이룰 것이며, 아코디언은 옛 기억의 정취를 음악에 실어 담아낼 것이다. 그 멋진 연주에 맞춰 노회한 여인들은 자신의 인생과 마을이야기를 담아 노래할 것이다.

그들의 연주와 노래를 들으며 우리는 인생을 만나고, 그들은 스스로의 삶과 마주하며, 그들이 사는 마을 비비정은 ‘함께 하는 가치’에 대한 소중한 경험으로 더 풍성해지리라.


# 이 원고는 완주군 비비정마을 소식지 '비비정마을신문' 9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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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완이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