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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24 [신정일이 들려주는 삼례역사 이야기] 삼례와 동학

동학의 교주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며 서인주를 비롯한 남접계가 공주집회를 열었던 때가 1892년 10월이었다.

미온적이었던 북접의 최시형도 교도들이 요청하자 10월 27일에 교도들을 삼례에 모이도록 하였다. 11월 3일 삼례에 수천면의 교도들이 모여 집회를 열었는데 그 사건을 삼례집회라고 부른다. 전라감사는 해산을 종용하며 앞으로 신원과 관리들의 탐학을 근절시키도록 하겠다는 글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리들의 탐학이 계속되자 고부에서 1차 봉기가 일어났다.

삼례 집회가 일어났던 삼례에는 지금 동학역사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삼례 집회가 일어났던 삼례에는 지금 동학역사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고부의 농민 봉기로부터 전주화약까지의 동학 1차 봉기는 반봉건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례에서 다시 기병한 2차 봉기는 한 단계 더 진전된 상황이었고 외세와의 완전한 전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대세를 지켜보던 전봉준(全琫準)이 전라도 각지에 격문을 띄워 동학농민군 4천여 명을 삼례에 재집결한 것은 1894년 9월 초순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전 과정을 기록한 오지영(吳知泳)의 『동학사(東學史)』에 따르면 전라도 27개 고을에서 모인 농민군의 수를 11만 5천 명 정도로 기록하였으나 전봉준은 공초에서 4천여 명으로 밝히고 있다. 동학농민군들은 그들 스스로를 의병이라고 불렀고, 어느 때보다도 사기가 충천했다. 황토현, 황룡강 싸움의 승리도 승리려니와 전주화약 이후 농민통치까지 경험한 그들은 무서울 게 없었다.

삼례 집회가 일어났던 삼례에는 지금 동학역사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삼례 집회가 일어났던 삼례에는 지금 동학역사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농민군의 2차 기병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집권세력은 허겁지겁 군사를 끌어 모았다. 그러나 가까스로 모인 관군은 1~2천 명에 지나지 않아 농민군과 싸움을 벌이기엔 중과부적이었고 믿을 수 있는 곳은 일본군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이 자꾸 서울을 빠져나갔기 때문에 서울은 불안하기만 했다. 그때 남북접(南北接)이 힘을 모아 서울로 진격하였더라면 농민군의 발길이 장안을 휘저었으련만 …. 서울로 진격하기에 앞서 군사적 행동을 부정하는 북접의 완강한 반대와 남북접의 해묵은 대립으로 인하여 농민군의 발목이 묶이고만 것이다. 서울 거리에 보국안민과 척양척왜의 깃발을 휘날릴 수 있는 기회를 잃은 셈이다. 

  남북접 회담이 결렬되자 최시형(崔時亨)을 비롯한 김연국, 손천민, 손병희, 황하일 등의 북접 교단은 오히려 삼례에 모인 농민군을 토벌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남접의 농민군을 토벌하겠다는 의미의 깃발인 벌남기(伐南旗)까지 만들어 호남의 농민군을 공격하려 하였다. 북접의 이러한 태도로 말미암아 농민군의 진격은 20여 일 가량 늦어졌고 그 때문에 공주영이 관군에게 선점 당하게 되었다. 한양으로 진격하기는커녕 오히려 남북접은 내란 일보 직전에 다다른 것이다. 그때의 상황을 오지영은 『동학사』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삼례 집회가 일어났던 삼례에는 지금 동학역사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삼례 집회가 일어났던 삼례에는 지금 동학역사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갑오년의 난을 당하여 전라도를 남접이라 이름하고 충청도를 북접이라 이름 하여 서로 배척하게 되었고 또 우스운 일은 전라도에 있어도 북접파가 있고 충청도에 있어서도 남접파가 있어 그것이 거의하는데 큰 문제가 되었다. 처음은 언쟁으로 하다가 차차 육박전으로, 끝에는 살육하는 데까지 이르러 서로를 짓밟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 전봉준과 오시형은 남북접의 대립은 모든 농민군에게 절대 불리한 것을 확인하고 보은에 있는 최시형을 찾아갔다.

  드디어 해월 최시형은 북접의 각도에 “인심이 곧 천심이고 이는 천운이 이르는 바이다. 고로 너희들은 도중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하여서 나아가 우리 도(道)의 큰 뜻을 실현시켜라”는 통문을 발송하고 청산집회를 소집했다. 극적인 타협의 실마리를 찾은 것이었다. 벌남기(伐南旗)는 찢어 버렸고 남북접의 대립은 해소되었다. 북접은 여러 군현의 관아를 습격하였고 무기를 거두어 청산에 집결한 다음, 영동과 옥천을 거쳐 내려와 호남의 농민군과 합세하기로 하였다. 농민군은 위봉산성에 있는 무기와 화약을 실어다가 무장을 강화하였다. 무기가 지급되지 않은 농민군을 위해서는 대나무를 베어다 죽창을 만들어 지급하였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내일은 논산, 모레는 공주” 그리고 서울로의 진격만 남았던 것이다.
 
손화중은 광주로 갔고 김개남은 49일을 머물러 있어야한다는 참서의 내용을 내세워 남원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동학농민군들은 여산 공주를 거쳐 서울로 가는 대장정에 접어들었는데 그 때가 구월 하순이었다. 동학농민군은 가벼운 마음으로 여산으로 북상했는데 삼례에서 여산까지는 40리였다. 여산을 지나 은진을 거쳐 강경포에 도착한 것은 10월초였다.

Posted by 완이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