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이의 발소리가 가까이서 들리자 김 진사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막내딸의 손을 잡고 안방에 들였다.
김 진사는 “그래 잘 지냈느냐? 네가 집을 나가고 나서 이 아비가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너는 모른다. 그나마 최근에 네가 보내준 편지를 읽고 얼마나 다행스러웠던지…… 니가 보내준 곡식과 고기를 먹으며 너에게 얼마나 고마운 마음이 들던지 그러면서도 니 얼굴을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잘 왔다. 정말 잘 왔어.” 하며 기뻐했다. 그러고선 밥상을 내밀며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많이 먹어라.” 하는데 연이는 자신이 집에 오게 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지 몰라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언니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 “그런데 언니들은 어째 안 보이네요, 아버지?” 하며 물었다.
사실 두메장수는 옥황상제에게 벌을 받기 바로 전에 연이의 언니들이 옥계천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챘는데 연이가 그 소식을 듣고 슬퍼할 것을 염려해 일부러 연이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고선 언니들의 시신을 거둬 자신만이 아는 어느 구석진 곳에 몰래 묻어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모르는 것은 김 진사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모르겠다. 동네 사람들 말로는 마을의 온갖 오물을 모으더니 어디로 가더라고 하던데…… 나도 잘 모르겠구나. 그나마 네가 잘산다고 하여 발 쭉 뻗고 자려 하니 이번에는 너의 언니들이 문제구나. 뭐 나중에 너처럼 잘살기라도 하면 참 좋을 텐데…….”
“네. 걱정이네요. 저기 아버지 또 걱정시켜 드리긴 정말 싫은데 할 말이 있어요.”
“그래 무엇이냐?”
연이가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는데 처음에 밝았던 김 진사의 얼굴은 어느새 비 내리는 하늘처럼 어두워졌다.
“이를 어떡한단 말이냐? 이놈의 팔자가 드세서 내 이쁜 딸이 이리 고생을 하는구나. 일단 너의 지아비 말을 들어 여기서 머물 거라.”
이렇게 해서 다시 집에 머물게 된 연이는 어느덧 백 일이 넘어가자 불안함을 못 이기고 짐을 싸 두메장수에게 가보려 하는데 집에 웬 허리 굽은 노파가 찾아왔다. 노파의 형색은 비록 초라했으나 얼굴에서 행동 하나하나까지 기품이 넘치는 노인이었다. 노파는 갑자기 노래를 했다.
“내 하나밖에 없던 아들이 자신이 짓지도 않은 벌 때문에 벌을 받아 또 동굴에 갇혀버렸네. 전에 내 아들 구해준 그 착한 옥 아가씨는 어디 있나? 그 아가씨 아니면 내 아들 구해줄 사람 하나 없건만.”
노래를 듣던 연이는 한눈에 그 노파가 두메장수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노파에게 절을 하며 “제가 어찌하면 제 지아비를 구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구부정한 노파는 온데간데없고 아름다운 중년의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정말 제 아들의 아내가 맞군요. 지금의 일은 당신도 알다시피 제 아들이 한 짓이 아닙니다. 그것을 제가 계속 아버지인 옥황상제께 말씀드려도 아버님의 화가 누그러뜨려 지지 않는군요. 단 한 가지 방법이 있으나 이것은 바로 제 아들의 아내 즉 두메장수의 아내인 연이 씨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나 다른 선녀들처럼 하늘나라 사람들은 자신이 한번 내려간 지역에서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죠. 연이 씨 지금 제가 하는 말을 명심해두세요. 옥황상제님은 생각만큼 그리 속 좁은 분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세 가지 보물을 망가뜨린 제 아들이, 아끼는 옥계천 관리도 소홀히 하자 평소보다 화가 많이 나셔서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연이 아가씨가 보물 세 가지를 가지고 옥황상제님께 가시면 아마 용서해주실 거라 생각됩니다. 그 보물들을 한번 구해 보시겠습니까?”
연이는 약간 당황이 되기도 하였으나 사랑하는 두메장수와 다시 잘살 수만 있다면 어떠한 위험도 두렵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선녀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선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이 씨 지금 당장 송광사의 소조사 사천왕을 찾아가서 그들에게 악귀를 죽인 칼 한 자루만 달라 그러세요. 그들은 비록 무서운 얼굴에 큰 덩치를 가졌지만 연이 씨처럼 착하고 순수한 분들께는 한없이 너그러우신 분들입니다. 시험을 통해 연이 씨가 얼마나 순수한 사람인지 알아보고선 칼을 주시면 그 칼을 이 자루에 담으십시오. 이 자루는 아무리 무거운 물건을 넣었더라도 들었을 때 무겁지 않은 주머니로 여행하실 때 아주 간편하실 것입니다.”하고 주머니를 주는데 예쁜 분홍비단에 나비모양을 수놓은 아주 아름다운 것이었다.
연이가 주머니를 두 손으로 받자 선녀가 말을 이었다.
“그러고선 수만천으로 향하세요, 여러 가지 물줄기 중에 제일 끝에 있는 마지막 만 번째 줄기에 가면 조그마한 이무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무기에게 지금 제가 드리는 구슬을 주면 아마 이무기가 품고 있던 비늘을 줄 것입니다. 그것을 찬물에 200번 씻으면 반짝이는 보석이 됩니다. 그것을 또 주머니에 넣으세요.”
선녀가 건넨 구슬은 영롱한 빛을 띠는 아주 예쁜 구슬이었다. 그것 역시 연이가 조심스레 받자 선녀가 말을 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천등산에 가세요. 그럼 천등장수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면 아마 편지를 써줄 것입니다. 그것을 갖고 다시 대둔산에 돌아오시면 두메장수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더니 갑자기 ‘펑’하며 사라지는데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연이는 송광사로 향했다.
쉬지 않고 걸어 석 달 만에 도착한 송광사 입구에는 과연 무시무시하게 생긴 사천왕이 두 눈을 부릅뜨며 연이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이곳을 찾았는가?”
“제 지아비인 두메장수를 구하러 왔습니다. 악귀를 죽인 칼 한 자루만 주세요.”
사천왕은 하늘이 무너질 듯 크게 웃더니 북쪽에 있던 다문천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저기 보이는 송광사 안쪽 나무에 핀 꽃 한 송이를 따 오너라.”
하여 안쪽 구석 나무로 가보았더니 과연 아름다운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두 송이의 꽃만 피어 있었는데 하나는 방금 핀 듯 아주 생기 있어 보이는 꽃이었고 하나는 이제 곧 떨어질 듯 시든 꽃이었다. 연이는 고민하다 어쩌면 사천왕께서 화를 낼 수도 있으나 생기 있는 꽃보다 시든 꽃을 따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를 그나마 거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시든 꽃을 사천왕께 바쳤다.
그러자 사천왕은 또 크게 허허 웃더니 “그대는 매우 현명하고 고운 처자로다. 자 여기 칼을 줄 테니 지아비를 구하거라.” 하는 것이 아닌가. 연이는 너무 기뻐 감사하단 말을 전하고 주머니에 칼을 담은 후 수만천으로 향했다. 연이는 지친 줄도 모르고 걷다 또 석 달 만에 수만천에 다다랐다. 과연 만 번째 물줄기에는 조그마한 이무기가 있었다.
연이는 구슬을 꺼내 들고 말했다.
“이무기야 이 구슬 물고 비늘 한 조각만 내게 다오.”라고 하자 이무기는 구슬을 물고 커다란 용으로 변했다. 연이는 그 광경이 무섭고도 신기해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용이 비늘 하나를 떨어뜨려 주고서는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하늘로 승천했다.
연이가 비늘을 꼭 쥐고 차가운 물에 씻으려 두 손을 넣었는데, 그 물이 얼마나 차가운지 간신히 200번을 씻어냈다. 연이의 손은 벌겋게 울퉁불퉁 퉁퉁 불어 있었고 두 손에 있던 비늘은 온데간데없고 빛나는 보석이 있었다.
#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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