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점점 거칠어져 갔고 그런 아빠를 볼 때마다 아빠가 누군가를 때릴 것만 같은 공포감을 느끼곤 했다. 그런 아빠가 나는 너무 무서워서 무슨 일이든지 조심하며 지냈다. 특히 필리핀 엄마를 부를 때 ‘엄마’라는 단어에도 힘을 주며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마라는 말이 이제는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다.
아빠는 필리핀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이상하리만치 불안감을 보였다. 그리고 내 방으로 달려가 벽시계를 들추며 여권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이런 아빠 때문에 식구들 모두 불안한 마음으로 위태롭게 지내던 어느 날,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필리핀 엄마 방에 있는 물건들이 마당에 널브러져 있고 그 주위에서 우는 필리핀 엄마를 보게 되었다.
필리핀 엄마의 머리는 마구 헝클어져 있었고 코피가 났는지 코 주위에 피가 묻어 있었다. 처음엔 나는 코에서 나는 피는 코피 말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그게 우리 아빠 때문에 생긴 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머니가 필리핀 엄마를 보살피시며 하시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고! 저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이 착한 애에게 손찌검을 하다니……, 자기 하나 믿고 그 멀리서 온, 이 착한 애에게…….”라며 말씀하시는 할머니 볼엔 이미 눈물이 가득 자국을 남기고 있었고 그런 볼 위로 계속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아빠의 폭력은 나날이 심해져만 갔다. 필리핀 엄마는 어느 날은 입이, 어느 날은 눈이, 어느 날은 볼이 아빠의 손이 남긴 흔적으로 채워졌다. 필리핀 엄마는 아빠가 의심할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될 수 있으면 밖에 나가는 일을 삼가고 집 안에만 있기 시작했다. 그러나 필리핀 엄마의 이런 노력에도 아빠의 의심병은 고쳐지지 않았다.
필리핀 엄마에게 날개옷을 돌려주다
한국에 일하러 온 필리핀 엄마의 사촌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는 필리핀 엄마의 수화기를 빼앗은 아빠는 남자 목소리를 듣고 누구냐며 필리핀 엄마를 몰아세웠다.
필리핀 엄마가 아무리 사촌오빠라고 말을 해도 아빠는 필리핀 애인과 도망갈 모의를 하냐며 못살게 굴기 시작했다. 아빠는 ‘내 다리가 이 모양이라 네가 도망가도 널 쫓아가지 못할 줄 아나 본데’라며 급기야는 필리핀 엄마를 또 때리기 시작했다. 집안 어른들이 모두 밖에 나가 계셔서 아빠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일하고 온 아빠의 아픈 다리를 주물러주던 필리핀 엄마! 그런 필리핀 엄마를 고마워하던 아빠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를 모르겠다. 그러나 아빠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미움이 컸고 그만큼 필리핀 엄마가 불쌍했다.
필리핀 엄마는 내게 부탁을 했었다. 아빠가 필리핀 엄마를 때릴 때 절대 나오지 말라고! 동생들에게 아빠의 그런 모습을 절대 보이지 말라고! 나는 동생들과 함께 아빠를 말리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필리핀 엄마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여동생에게 쌍둥이들을 맡기고 필리핀 엄마를 구하러 갔다.
아빠는 내가 온 것도 모르고 필리핀 엄마를 때리고 있었다. 처음 보았다. 필리핀 엄마를 때리려 할 때면 항상 어른들이 우리를 방으로 후다닥 들어가게 했기 때문에 볼 수 없었지만, 오늘은 모든 것을 보고 만 것이다. 나는 둥글게 몸을 말고 있는 필리핀 엄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내 몸으로 필리핀 엄마를 감싸주었다. 아빠는 이런 나를 보고 당황하며 필리핀 엄마를 때리는 것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셨다. 항상 그러듯이 아빠는 또 술을 마시러 나가시는 걸 거다. 그러니 한동안 필리핀 엄마도 쉴 수 있을 것이다.
아빠가 밖에 나가시는 소리가 들리자 동생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필리핀 엄마에게 달려왔다. 동생들은 필리핀 엄마에게 안기며 울기 시작했다. 필리핀 엄마는 그런 동생들을 안아주었다. 눈물, 콧물이 된 동생들이 잠들자 필리핀 엄마는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필리핀 엄마를 조용히 바라보다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책상의자를 벽시계가 있는 쪽으로 옮겼다. 의자에 올라가 벽시계를 들어 올린 다음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 여권을 감싸 놓은 비닐을 벽에서 떼어 내었다. 조심스럽게 떼어 낼 필요도 없었다. 아빠가 계시지 않으니깐. 아빠에 대한 원망을 담아 한 번에 떼어내었다. ‘짝……!’ 벽지가 함께 떨어져 나왔다.
나는 비닐을 떼어 낸 여권을 손에 꼭 움켜쥔 채 필리핀 엄마에게 갔다. 그리고 말없이 여권을 내보였다. 선녀가 날개옷을 찾고 기뻐했듯이 여권을 보면 기뻐할 줄 알았는데 필리핀 엄마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 내 손을 바라볼 뿐 여권을 내게서 가져가지도 않았다. 대신 잠들어 있는 동생들 쪽으로 눈을 돌리며 좀 전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동생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필리핀 엄마에게 더 바싹 다가가서 필리핀 엄마의 손에 여권을 쥐어주었다. 내 눈에도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왜 우는 걸까? 나는 왜 우는 걸까? 필리핀 엄마도 우리랑 헤어지는 것이 싫은지 계속 울기만 했다. 하지만, 필리핀 엄마를 보내주는 것이 더 옳은 길이라고 난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필리핀 엄마에게 선녀옷을 내주었다. 그렇게 필리핀 엄마는 우리에게서 떠나갔다. 내가 준 날개옷을 입고…….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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