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엄마의 여권
‘찍…찍…찍… 찍, 찍’ 이상한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크…… 술 냄새’ 아빠가 우리 방에 들어오신 것 같다. 아빠는 요즘 부쩍 술을 드시고 밤늦게 들어오시는 일이 많아지셨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실눈을 뜨며 손전등을 세워놓고 무언가를 하는 아빠를 바라보았다. ‘찍…찍…찍… 찍, 찍’ 스카치테이프를 조심스럽게 뜯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벽시계 뒤에 무언가를 숨기신 것 같다. 잠자는 척 아빠를 몰래 지켜보다가 나도 모르게 다시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어제 아빠가 무엇을 숨겼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난 아빠가 없는 틈을 타서, 의자 위에 올라간 다음 벽시계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스카치테이프로 벽에 무언가를 붙여놓으셨다. 비닐에 쌓여 있는 그 무언가를 자세히 보았다. 무슨 얇은 수첩 같았는데 내가 보는 부분은 수첩의 뒷부분인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벽에 붙어 있는 스카치테이프가 뜯어지지 않게 수첩을 들어보았다. ‘찌지 직’ 아이고! 큰일이다! 스카치테이프가 벽에서 조금 뜯어졌다. 순간 다 포기하고 얼른 벽시계를 다시 걸어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이 쿵쿵, 얼굴에선 열이 났지만 궁금한 것이 더 컸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조금 더 용기를 가지고 수첩을 위로 들어보았다. 그리고 이마를 벽에 바짝 붙이고 수첩과 벽 사이의 공간을 이용해서 수첩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영어로 된 글씨가 보였다. 작아서 읽기가 어려웠다. ‘P…A…S…S…P…O…R…T’ ‘PASSPORT’ 학교에서 배운 단어였다. 여권……. 난 쿵쿵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금 전 소리를 낸 부분의 스카치테이프를 벽에 꽉꽉 문질렀다. 손에서 땀이 났다는 것을 그때야 알았다.
나는 그것이 필리핀 엄마의 여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빠가 왜 여권을 숨겼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빠가 걱정되었다. 필리핀 엄마도 걱정되었다.
며칠 뒤 필리핀 엄마가 여권이 없어졌다며 난감해하셨다. 난 아빠 얼굴을 몰래 훔쳐보았다. 아빠의 굳은 얼굴을 보고 눈치 빠른 필리핀 엄마는 아빠가 숨긴 것을 알았는지 더는 여권을 찾지 않았다. 그런 필리핀 엄마가 고맙게 느껴졌다.
이렇게 여권 사건은 무사히 지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며칠 뒤 일이 터지고 말았다. 할머니가 필리핀 엄마를 부르셨다. 필리핀에서 전화가 온 것이다. 필리핀 엄마는 오랜만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뛰어갔다. 그런데 전화를 받는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필리핀 엄마의 엄마가 위독하시다는 전화였던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필리핀 엄마에게 항공권을 살 수 있는 돈을 마련해주셨다. 필리핀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어머니 고마워요!”라며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빠다. 아빠가 도무지 필리핀 엄마의 여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 거다.
필리핀 엄마가 몇 번이나 도망가지 않는다고 이야기해도 아빠는 믿지를 않았다. 필리핀 엄마는 여권이 있어야 필리핀에 갈 수 있다며 울면서 아빠에게 여권을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아빠는 필리핀 엄마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고모, 고모부까지 나서서 설득해도 아빠는 여권을 주시지 않았다. 설득이 길어지자 아빠는 막 소리를 지르시며 주위에 있는 물건들을 던지고 부수기 시작하셨다. 동생들이 울기 시작하고 어른들은 처음 보는 아빠의 모습에 모두 놀라셔서 당황해 하셨지만, 고모가 곧 우리를 방으로 들여보내시고 나머지 분들은 아빠를 말리셨다. 그렇게 필리핀 엄마는 필리핀에 가지 못하셨다. 다행히 며칠 뒤 필리핀 엄마의 엄마가 위험한 고비를 넘기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선녀와 나무꾼
여권 사건 이후 미안해해야 할 아빠는 더 난폭해지고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필리핀 엄마는 점점 말라가고 얼굴이 더 어두워져 갔다. 그러나 여전히 부지런하고 우리에게 따뜻했다.
어느 날 내게 쌍둥이들이 책을 읽어 달라며 동화책을 내밀었다. 귀찮았지만 쌍둥이들 책을 읽어주는 일은 나와 여동생 몫이었기에 읽어주었다. 다른 때라면 여동생에게 미루었겠지만, 요즘 풀이 죽어 있는 쌍둥이들이 모처럼 부탁한 일이었기에 선뜻 책을 받아 들었다. 쌍둥이들이 내민 동화책은 ‘선녀와 나무꾼’이었다.
선녀와 나무꾼이라면 사실 책을 보지 않아도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동생들이 내민 그림 동화책의 그림이 나도 보고 싶어져서 책장을 넘기며 읽어주기 시작했다.
동생들은 내 옆에 딱 달라붙어서 눈으로는 그림을 보고 귀로는 내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렇게 읽어 주던 중 ‘나무꾼은 선녀의 날개옷을 숨겼어요. 그래서 선녀는 아버지, 어머니, 언니들이 있는 하늘나라로 갈 수 없었답니다.’라는 부분을 읽게 되자 불현듯 필리핀 엄마가 떠올랐다. 나는 필리핀 엄마의 선녀옷이 마치 여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녀가 나무꾼만을 남기고 아이 셋을 데리고 하늘로 가는 내용이 나왔을 때 큰 쌍둥이가 내게 물었다.
“형아, 왜 선녀가 나무꾼만 남기고 떠났을까?”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선 이런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건 나무꾼이 착한 선녀를 의심하고 선녀옷을 숨겼기 때문이야. 아이들을 잘 기르는 선녀에게 선녀옷을 숨긴 사실을 고백했다면 선녀도 용서해주었을 거고 선녀는 하늘에 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만 놀러 갔을 거야. 그랬다면 선녀가 그렇게 나무꾼만 남겨놓고 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고…….”
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나서 난 속으로 생각했다. 선녀야 처음부터 나무꾼이 옷을 숨겨서 어쩔 수 없이 나무꾼과 살게 된 거지만, 필리핀 엄마는 처음부터 아빠가 좋아서 필리핀에서 온 건데 왜 여권을 숨기고 주지 않는지 아빠가 답답했다.
#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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