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속으로2009/07/29 09:18


말이 정말 씨가 되었다!

호칭 하나 바뀌었다고 엄마로 인정한 것도 아닌데 어른들은 무척 기뻐하셨다. 하긴 나도 짝퉁 엄마에서 필리핀 엄마로 바꿔서 부르고부터는 필리핀 엄마와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것 같았다.

이렇게 그럭저럭 괜찮은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감나무집 할머니네 며느리가 도망갔다는 소문이 동네에 쫘악 퍼졌다. 그리고 그 소문은 사실로 밝혀졌다. 그 소식을 들은 할머니는 말이 씨가 됐다며 미안해하셨다. 고모는 남한테 악담한 것이 그대로 자신에게 갔는데 뭐 그런 걸 신경을 쓰시냐며 할머니의 마음을 풀어 드리려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영 마음이 편치 않으신 것 같았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동네 어른들이 모인 곳에는 끊임없이 외국 아줌마들 이야기가 흘러넘쳤다. 어느 동네 누구 집 새댁이 시집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도망을 갔다느니, 친구의 친구 오빠 부인이 어떻다느니 등등 내가 주워들은 이야기도 꽤 된다.

동네 아이들이 모인 곳에서도 아이들끼리 주워들은 이야기를 서로 경쟁적으로 늘어놓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는 한 녀석이 나에게 “야, 너희 짝퉁 엄마도 조심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난 우선 짝퉁이라는 소리에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주먹을 날렸다. “뭐? 짝퉁?”

녀석은 눈물이 뒤범벅된 얼굴로 “네가 짝퉁 엄마라고 했잖아!”라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순간 양심에 찔린 나는 머뭇거렸지만, 곧 “이제 짝퉁 아냐! 그리고 우리 집 필리핀 엄마는 도망가지 않아!”라며 못박았다. 더는 놀 기분이 아니라서 집에 들어온 나는 화가 난 나 자신이 이상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이상한 것이 더 있었다. 이제 짝퉁 엄마라는 소리가 싫었다. 그리고 필리핀 엄마가 도망갈 수 있다는 말도 싫었다. 도망간다는 말이 씨가 되기를 그렇게 바랐었는데 말이다.


의심병의 시작
 

필리핀 엄마는 도망간 감나무집 할머니네 며느리와 같은 나라 사람이었기에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 감나무집 사람들은 우리 집에 와서 필리핀 엄마에게 혹시 연락은 오지 않았느냐, 뭐 들은 이야기 없냐며 몇 번이나 묻고 갔다. 아빠는 감나무집 아저씨가 안돼 보였는지 아저씨가 오실 때면 위로해 주신다고 함께 술을 드시는 일이 많아지셨다. 할머니는 그렇지 않아도 감나무집 일을 마음에 걸려 하셨기에 특별히 신경을 쓰시며 아저씨를 맞아 주셨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가게 아줌마가 헐레벌떡 우리 집으로 뛰어 들어와서 할아버지를 모시고 갔다. 아빠와 감나무집 아저씨가 술을 드시다 두 분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그 싸움은 할아버지가 가게까지 가셔서 두 분을 떼어 놓고서야 간신히 끝났다. 동네 사람들 말로는 감나무집 아저씨가 우리 아빠에게 자기 부인과 필리핀 엄마가 엄청 친하게 지냈으니 필리핀 엄마 단속을 잘하라고 했다는 거다. 함께 도망치려다가 기회를 놓쳐서 자기 부인 혼자 도망간 것일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 여기까지는 우리 아빠도 그냥 꾹 참고 들으셨단다. 그런데 아저씨가 멈추지 않고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꺼내며 아빠 마음을 들쑤셔놓았다고 한다. 그제야 나는 아빠가 왜 그렇게 화를 내셨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때마침 텔레비전에서도 ‘농촌 총각 울리는 국제결혼’이라는 프로를 앞다퉈 내보냈다. 우리 집은 괜찮으냐는 친척들과 아빠 친구들의 조심스러운 전화가 이어졌다.

우리 집은 괜찮으냐는 사람들의 말은 곧 우리 집의 필리핀 엄마는 괜찮으냐는 말일 것이다. 즉 필리핀 엄마가 도망가거나 하지 않았느냐는 뜻이라는 것을 난 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필리핀 엄마를 걱정했다. 그런데 정작 걱정해야 할 사람은 아빠였던 것 같다. 아빠가 이상해졌다는 것은 곧 알 수 있었다.

감나무집 며느리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 구청에서 외국인 아줌마들의 모임을 주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었다. 필리핀 엄마도 다른 외국 아줌마들처럼 이 모임을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날짜를 꼽으며 기다리셨던 아빠였다. 그런데 당일이 되자 아빠는 갑자기 필리핀 엄마에게 가지 말라고 하셨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도움으로 간신히 갈 수 있었지만, 필리핀 엄마의 걸음은 무거워 보였다.

시내에 나간 필리핀 엄마가 오지 않자 아빠는 안절부절못하셨다. 필리핀 엄마가 오겠다고 한 시간보다 아직 2시간이나 남았는데 아빠는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셨다. 필리핀 엄마는 차가 오지 않아 늦었다며 미안하다고 하셨다. 오겠다는 시간보다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아빠는 필리핀 엄마가 마을 밖에 나가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기 시작했다. 필리핀 엄마가 마을 안에 있어도 아빠는 마치 숨은 사람은 없는데 혼자 술래잡기를 하는 사람 마냥 그렇게 필리핀 엄마를 찾아다녔다. 우리 엄마처럼, 달아난 다른 외국 아줌마들처럼 필리핀 엄마도 도망갈 거로 의심하는 것 같았다. 아니 의심하는 병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 다음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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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완이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