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이 힘들거나 외로울 때가 있다. 완주군 불명산(佛明山·428m) 자락에 자리 잡은 화암사(花巖寺)는 그런 마음이 들 때 찾아가면 좋은 곳이다. 화암사는 큰 사찰도 아니고 화려한 문화재가 있는 곳도 아니지만, 현대 문명의 헛바람을 맞지 않고 오랜 세월 '곱게 늙어 온' 절이기 때문이다. 화암사로 향하는 길은 한적하다 못해 외롭다. 첩첩 산중. 인기척 없는 길에서 한없이 외로운 자연과 대면할 때, 자신의 외로움은 하찮게 느껴지고 묵은 근심은 풀어진다. 화암사를 '나 혼자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 작지만 소중한 책 같은 절'이라고 소개한 안도현 시인도 화암사의 적막을 그리워한다. 
 

화암사 경내

화암사 경내

 

人間世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아예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그 절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절집 형체도 이름도 없어지고,
구름의 어깨를 치고 가는 불명산 능선 한자락 같은 

참회가 가슴을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이
화암사 안마당에 먼저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하였습니다.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안도현의 시 「花巖寺, 내 사랑」 전문

 화암사 여정의 백미는 산수화가 그려진 병풍을 한 폭 한 폭 펼쳐보는 것과 같은, 절에 오르는 길에서 시작된다. 참나무 숲을 지나면 곧 계곡이다. 길은 이제부터 계곡과 나란히 이어진다. 수정처럼 투명한 계류(溪流)가 청아하게 속삭이며 흐르는 계곡 길은 곳곳마다 푸른 이끼를 쓴 기암들과 작은 폭포들이 어울려 논다. 4월이면 숲길 한쪽에 가도 가도 얼레지 꽃이 지천이고, 높은 산에서나 볼 수 있는 산죽나무도 유난히 많다. 화암사는 풍광의 끝, 범인(凡人)들의 접근이 어려운 도솔천처럼 까마득한 폭포 위에 자리 잡고 있다. 폭포를 거스르며 수직으로 놓인 70여 미터의 계단이 없다면 결코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다. 몇 번을 꺾이고 휘어지며 길게 놓인 아슬아슬한 철계단. 이 협곡은 사람의 발길이 닿기 힘든 곳이라 철계단 덕에 협곡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었지만, 사람이 만든 계단이 아름다운 협곡을 망가트린 셈이기도 하다. 대체 누가 폭포에다 계단을 만들었을까? 어느 행인에게 물었다. 

"1980년 초반에 완주군수가 왔다가 넘어져서 크게 다쳤답니다. 그래서 군수가 당시에 돈 1억원을 들여서 만들었다고 해요. 모르긴 해도 길이 험해서 옛날엔 스님들도 많이 다치고 죽기도 했을 것이오. 옛날에는 다들 지게지고 다녔잖아요. 그래, 그 계단이 필요하다니까요." 


그래서 시인은 '문득 화암사가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고 지은 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표현한 모양이다. 

화암사 중창비

화암사 중창비

화암사는 8백여평의 바위 위에 지어진 절이다. 그러나 언제 누구에 의해 지어졌는지 자세한 기록은 없다. 중창비에 신라시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이 절에 머물면서 수도를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신라 36대 문무왕(재위 661∼681년)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법당에 모셔 놓은 수월자용상은 의상이 도솔산에서 직접 보았던 것을 그대로 재현한 것. 원효대사가 도를 닦았다는 원암대가 화암사 동쪽에 있고, 의상대사가 도를 닦았다는 의상암이 남쪽에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 후 화암사는 부분적인 중건과 중수를 거치며 이어오다가 1425년(세종 7) 평안도 관찰사 성달생의 뜻을 따라 주지 해총스님이 중창했다고 한다. 이 때 대가람(大伽藍)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임진왜란 때 극락전 등 몇 개의 당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으며, 그 뒤의 역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다. 상량문에 따르면 화암사는 1605년에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임진왜란 끝날 즈음 1597년에 화암사가 불타버렸다. 타버린 극락전을 10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지은 셈이다. 임란 이후에 많은 절간이 다시 지어졌지만 화암사가 가장 빨리 재건한 축에 속한다. 그만큼 화암사는 인근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현재까지 절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17세기 절간들의 짜임새와 분위기를 담고 있다. 

화암사에는 보물 제662호인 우화루(雨花樓)가 있다. 비가 꽃처럼 떨어지는 다락. 현판은 투박하고, 낡았다. 글씨는 흐릿하고, 벽은 까맣게 때가 묻었다. 그래서 더 애잔하니 곱다. 우화루 옆 작은 대문이 경내로 들어가는 문이다. 문지방은 움푹 파인 달문이다. 문턱에 둥글게 휘어진 나무를 대서 천연스런 아름다움을 이룬 문을 들어서면 적묵당, 극락전, 우화루, 요사채가 고만고만한 크기로 서로 네 귀를 맞추듯 서 있다. 

절 입구에 있을 법한 일주문도 사천왕상도 없이 경내로 들어서려면 작은 문 하나를 통과해야 한다. 잊을 수 없다. 세월에 닳은 문턱을 처음 넘어설 때, 나는 마치 어릴 적 외갓집 대문을 넘어 마당으로 발을 들여놓을 때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실제로 ㅁ자형 구조를 가진 경내로 들어가면 그곳은 절이 아니라 여염집의 편안한 안마당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때의 적막은 또 얼마나 큰 위안인가.(안도현의 수필 「잘 늙은 절, 화암사」 중에서)

우화루는 절의 앞쪽에서 보면 우람한 다섯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2층 누각이지만 경내에서 바라보면 단층구조다.
우화루 왼쪽 돌담을 끼고 돌아가면 정갈하게 지어진 해우소(解憂所)가 정겹고, 오른쪽에 사시사철 멈추지 않고 뿜어내는 약수가 맑다. 화려한 단청이 미치지 못할 격을 지니고 수수하게 나이 들어가는 사적들. 

우화루 정면 우화루 후면

우화루 정면 우화루 후면


극락전은 이 땅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백제건축의 유구다. 건축학자들은 극락전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하앙구조를 갖추고 있는 법당이라고 자랑한다. 하앙구조란 처마를 길게 늘이기 위한 건축기술 중 하나로, 일종의 겹서까래 구조다. 지붕의 하중을 분산시켜 그 위에 서까래를 얹으면 그만큼 처마를 길게 뺄 수 있다. 1970년 이전까지만 해도 하앙구조는 중국과 일본에서만 발견됐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는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절』이란 책에서 '희귀한 구조에 대한 관심이 없더라도 이 절은 환상적인 입지와 드라마틱한 진입로, 그리고 잘 짜인 전체 구성만으로도 최고의 건축이다'고 소개했다. 

극락전 안에선 유난히 정교한 아름다움을 지닌 닫집과 조선시대 동종을 볼 수 있다. 밤이면 저절로 울려 스님과 신도들을 깨웠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전해지는 종이다. 이 동종은 예전에는 사람이 종을 치지 않아도 밤이면 저절로 울려 스님들과 불공을 드리러 온 신도들을 깨웠다고 한다. 특히 일제강점기, 전쟁에 쓸 무기를 만들기 위해 조선의 쇠붙이를 강탈하던 일본 헌병들이 이곳 화암사로 몰려 올 때, 동종은 미리 스스로 울어 스님들에게 알렸다고 한다. 그래서 스님들은 이 동종을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해방이 된 뒤에 다시 꺼내어 오늘까지 무사히 보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화암사의 명물에는 두 마리의 흰둥이도 있었다. 

화암사 안마당에는
스님 모시고 노는 개 두 마리가 있습니다.
그 귀가 하도 맑고 깨끗해서
뒷산 다람쥐 도토리 굴리는 소리까지
훤히 다 듣습니다.

간혹 귀 쫑긋 세우고 쌩하니 달려갔다가는
소득 없이 터덜터덜 돌아올 때가 있는데
귓전에 닿는 소리에
덕지덕지 욕심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그냥 한번 그래 본 것입니다.

바람이, 일 없이 풍경소리를 내는 물고기 꼬리를
그저 그냥 한번 툭 치고 가듯이

/안도현의 시 「화암사, 깨끗한 개 두 마리」 전문


 시인의 시에 소개되면서 관심을 받았는데, 얼마 전 한 마리가 말도 없이 사라졌다. 휘어진 나무들이 구부정하니 기대고 있는 절의 벽처럼 첩첩산중에서 서로를 의지했을 두 마리 개의 이별은 화암사를 더 적묵(寂黙)하게 한다. 

화암사는 낡고 작고 허름하다. 세월에 부대껴 기둥은 까매졌고, 단청은 희미해졌다. 목어에는 두껍게 먼지가 내려앉았다. 그러나 너무 커서 위압적이지 않고, 화려해서 행인을 주눅 들게 하지도 않는다. 

세월에 지치고 늙어가서 더 마음이 가는 절, 그게 화암사다.

안도현 시인의 친필(제공 최명희문학관)

안도현 시인의 친필(제공 최명희문학관)

 

2007년 8월 22일 최명희문학관에서 열린 안도현 시인 초청문학강연

2007년 8월 22일 최명희문학관에서 열린 안도현 시인 초청문학강연

글쓴이  최기우
극작가.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작품 활동을 시작, 현재 연극·창극·뮤지컬 등 무대극에 집중하고 있다. 전북일보 기자를 지냈으며, 현재 최명희문학관 기획연구실장이다. 전국연극제 희곡상과 우진창작상, 불꽃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희곡집 『상봉』과 창극집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전북연극사(공저)』, 『전북문학지도: 사람이 사는 마을에 꽃은 피고(공저)』 등이 있다.
torogiwoo@empal.com


# 이 글은 전라북도 공식 블로그 '전북의 재발견'(http://blog.jb.go.kr)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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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완이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