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향기2011/06/28 14:09


 차마 마음에서 꺼내지 못했던 수많은 순간들을 발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가던 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의 눈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 삶이 그를 어둠으로 물들일 때, 그는 절망 대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만 기억하기로 고집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들이 손끝으로 묻어나와 제 형태를 갖추고, 색을 입었을 때 이름 모를 들꽃들은 하얀 여백 위로 생생히 살아 숨쉬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자신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이것은 한영만(55)씨의 생애이다.

 저는 6살 때부터 비비정 마을에 살았어요. 부모님과 형, 여동생이 함께 살았지요. 나이는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큰 소리에 놀라고 난 뒤로 들리지 않게 됐어요. 비행기 소리의  굉음과 같은 큰 소리에 놀랐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혼자 있는 걸 더 좋아했어요. 7~8살 때 학교에 가기 싫다, 집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했어요. 나가서 어울리는 것보다는 집에서 글을 쓰며 지냈던 것들이 더 마음에 편했거든요. 그렇지만 부모님은 밖에서 활동을 시키고 싶어 하셔서 항상 저를 밖으로 끌고 나갔던 기억이 있어요. 

 그림을 시작한지는 한 4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저 혼자 너무 심심했고, 고독했을 때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아름다운 것들이 세상에 가득했지요. 그래서 그것들을 보고 집에 오면 그 생각이 나서 그대로 묘사해서 그려보기 시작했어요. 그저 저 혼자 돌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보는 내용을 그렸을 뿐 주변에서 돕는 사람은 없었지요. 처음에는, 아버지와 어머니한테 많은 양의 그림들, 큰 종이에 그린 그림 몇 장을 부모님에게 보여드렸어요. 정말 열심히 노력해서 예쁜 그림을 그리고는 집에다 붙여놓고 가족에게 보여줬는데, ‘내가 그린 건 아니고.’ 라며 붙여놓았더니 부모님이 ‘어, 잘했다. 이거 누가 그렸어?’ 라고 물으셨어요. 정말 기뻤어요. 그림을 그리면 이런 저런 생각들로 복잡했던 마음들이 시원해지는 것 같아요. 이렇게 그림 그린 종이들이 쌓여가고, 붙여놓고 보는 것도, 다른 사람들이 잘 그렸다고 칭찬해주는 것도 정말 기분 좋은 일이지요.

 수화통역센터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가는데 앉아서 보통 A4용지에 7~8장 정도는 기본으로 그려요. 초반에는 그렇게 그리다가 조금 있으면 A3가 필요해져요. 종이가 좁아 표현이 잘 안되거든요. 그럼 그곳 선생님 앞에서 종이 크기를 표현하지요. 이만한 걸로. 그러다 요즘 이것도 부족해서 더 큰 4절지나 바닥에다 그림을 그려요. 저는 그림 그리는 게 너무 좋아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유화 물감으로 사물이나 꽃들을 그려보고도 싶고, 전시회도 하고 싶어요. 그림을 그리게 된 후로 제 삶의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요. 이제는 수화로 ‘나 잘했지? 나 이거 멋있지? 이거 뭐 그린 건지 알아? 이게 나이테고 이게 나이야. 대나무는 이게 나이래.’ 라고 표현할 수 있어요. 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니까요. 그림을 그려 선물을 할 수도 있지요.

 환하게 웃음 짓는 그림 그리는 사나이의 그을린 낯에는 오랜 세월을 견뎌내고 조심스럽게 연한 잎들을 틔어내는 고목나무의 견고함과 당당함이 배어 있었다.

*수화에 대한 통역은 “완주군수화통역센터 정은혜 수화통역사님”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 여기에 실린 그림은 한영만 어르신의 작품일부입니다. 하루에도 2~3장씩 4년 동안 수백장의 그림들을 연습하시고 작품도 만드십니다.

# 이 원고는 완주군 비비정마을 소식지 '비비정마을신문' 6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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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완이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