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례를 스쳐간 인물들.  역사 속에 자리한 인물들이 이곳 삼례역을 지나 벼슬길을 시작하기도 했고 유배를 가기도 했다. 고려 때의 대 문장가인 이규보가 남긴 <경신년 오월에 하사표賀赦表를 받들고 서울로 갈 때 삼례역에서 말을 타고 갔다.>라는 글 한편을 보자.

“옥함에 승두표를 봉해놓고 비단 자리에서 봉미생 우는 소리 들었지.
어제 취한 술기운으로 마상에서 조니 십리 강산을 꿈속에 지났구려. 
여기에서 서울이 스무 역(이 역에서 서울까지 스무 개의 역이 있어서 삼례역을 스무 역이라 불렀음),
평평한 벌 판 모랫길 멀기도 한데,
천문에 가서 금계로 놓아 준 하례코자 하니 기쁜 기운 얼굴에 감도누나.

왼쪽부터 허균, 송시열, 김시습

왼쪽부터 허균, 송시열, 김시습

 

고을살이 매인 몸이라 말하지 마오.
임금 뵈올 길 멀지 않아 기쁘기만 하네.
무엇이 부러우랴. 신선 왕 엽령이
쌍 오리 타고 한 나라 궁궐 조회한 것이“  <동국이상국집> 제 9권 

매월당 김시습은 이 삼례를 지나며 <삼례역에서 묵으며. 宿三禮驛>이라는 시를 남겼다.

반 평생 긴 세월을 길로써 집을 삼으니
일만 물 일천 산이 눈 속에 아득하네.
객관의 깊은 밤에 좋은 달을 바라보고
작은 뜰에 바람 스치자 떨어진 꽃을 주워 모으네.
벽골지碧骨池에 구름 걷히자 물결은 거울 같고,
금제벌에 비 내리니 보리 비로소 싹트네.
바닷가의 가을은 늙지 않는다. 들었더니
시냇가의 푸른 풀이 가늘고도 더부룩하네. <매월당 집> 2에 실린 글이다.
또 한 편 남긴 글이 <앵곡역(鶯谷驛)에서>라는 시 한편이다.

깃든 까지 까악 까악 대숲을 맴도는데
여정에 가을날 저물어 사람 마음 괴롭히네.
한 곡조 맑은 소리 강가의 피리인데,
어디에서 다독다독 달 아래 다듬이질인가?
옥로玉露가 마침 깊어 벌레소리 간절한데
금풍金風이 처음이니 나그네 정 깊어가네.
여창旅窓의 등잔 아래 말뚱말뚱 잠못 들고
때때로 가는 기러기가 멀리 소식 부치네.

그 뒤를 이어서 이곳 삼례를 지나갔던 사람이 교산 홍길동의 저자이며 혁명가이자 풍류객인 허균許筠이다.
<성서부부고>에 실린 <조관기행> 신축년 1601년 9월 7일 자 글은 다음과 같다.

7일(을미) 삼례에서 점심을 먹고 전주로 들어가는데, 판관이 기악과 잡희雜戱로 반마장이나 나와 맞이했다. 북소리 피리소리로 천지가 시끄럽고, 천오天吳(바다 귀신 춤). 상학翔鶴(학춤).과 쌍간희환雙竿戱丸과 대면귀검大面鬼臉(탈춤) 등 온갖 춤으로 길을 메우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성곽에 넘쳤다. 나는 큰 조카에게< 이 길이 네가 과거에 합격해서 돌아오는 길이 아닌 것이 s 한스럽다.“고 농담을 하니 그도 배를 잡고 웃었다.”

기호학파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宋時烈도 이곳 삼례에 흔적을 남겼는데, 갑인년 7월 9일 곽여정에게 답한 글 중 삼례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장성(장성군수를 지낸 송시열의 아우 송시도)은 병으로 기동하지 못하였고, 순창(순창군수를 지낸 송시열의 둘 째 동생) 송시걸)은 길을 나서 삼례까지 이르렀으나 사흘을 물에 갇혔다 돌아가버려(만경강 물이 불은 듯함) 두 동생과 부여잡고 슬픔을 나누지 못하였으니 한층 아픔과 비통이 간절하네.”

 그가 정읍에서 사사되어 돌아가는 길에 상여가 이곳 삼례를 거쳐 갔다. <송자대전> ‘송서속습유’ 부록 제 2권에 실린 부분을 보면 “13일(무인) 맑음......정오가 되기 전에 삼례에 도착하여 아침 상식을 올렸다....삼례 찰방 한전韓㙉이 조문하였다.” 라는 글이 실려 있다.

# 본 원고는 <2010 완주 길 세미나>에서 향토사학자 신정일님이 발표한 내용입니다 

Posted by 완이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