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호는 한 손은 단우를, 다른 한 손은 섬백을 잡고 정말 눈 깜짝할 새에 옥계천에 도착해 있었다.
“와……! 정말 대단한데……. 야, 섬백! 넌 이런 거 못해? 이런 능력이 있었으면 하루 종일 산만 오르내리는 고생은 안 했을 텐데.”
섬백은 단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노려보았다.
“농담이야 농담. 그런데 이무기는 무슨 수로 무찌르지?”
섬백의 매서운 기세에 눌린 단우는 얼른 꼬리를 내렸다.
“버들피리 소리로 이무기를 잠재운 다음, 이무기 몸에 소금을 뿌리면 이무기는 불타 죽게 돼 있어.”
섬백이 뾰로통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버들피리? 그거라면 내게 맡겨.”
단우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때였다. 단우의 등 뒤에서 기분 나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여우가 나타났군. 여우는 이 옥계천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내가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거대한 이무기가 시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단우 일행은 말이 끝나자마자 무섭게 달려드는 이무기를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단우는 옆에 있는 버드나무에서 가지를 얼른 딴 다음 버들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단우의 피리 소리가 고요한 계곡을 뒤덮자 시호의 뒤를 쫓던 이무기는 스르륵 눈꺼풀을 감더니 잠들어버렸다. 섬백은 주머니에서 얼른 소금 자루를 꺼내 이무기의 몸에 뿌리기 시작했다. 소금은 이무기의 몸에 닿자마자 불타기 시작했고, 삽시간에 이무기의 몸은 불에 휩싸였다. 불길은 하늘 높이 치솟다가 한순간 재가 되고 말았다. 시호가 잿더미 속을 손으로 들춰보자, 그 속에는 옥계천의 맑은 물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푸른 색의 구슬이 있었다.
“자, 이제 빨리 어머니한테로 가자.”
시호는 단우와 섬백의 손을 잡고 다시 대둔산으로 돌아갔다.
“어머니, 저희 왔어요. 이무기를 죽이고 왔어요.”
구미호는 시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나타났다.
“증거를 보여다오.”
시호는 구미호에게 푸른 구슬을 보여주었다.
“좀 더 가까이 그 구슬을 보고 싶구나.”
구미호가 푸른 구슬을 향해 손을 뻗자 단우는 그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약속대로 이무기를 죽이고 돌아왔으니 약속하셨던 구슬을 주시죠.”
“어머니…….”
시호가 애원하듯 구미호를 쳐다보았다. 구미호는 순간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하얀 구슬을 내밀며 말했다.
“내 너희를 죽이고 푸른 구슬까지 손에 넣을 생각이었지만, 차마 내 딸 앞에서 한 약속을 어길 수가 없구나. 여기 약속한 구슬이다. 내 맘이 바뀌기 전에 어서 가거라.”
“고맙습니다.”
단우는 하얀 구슬을 받아들며 구미호를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어머니, 저도 단우와 함께 떠나고 싶어요.”
구미호는 단우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 좋은 아이 같으니, 니 마음대로 하거라.”
시호는 빙긋 웃으며 단우를 쳐다보았고, 단우도 시호를 바라보며 웃었다. 섬백은 또다시 입을 삐죽거리며 단우를 뒤에서 째려보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어머님.”
단우도 시호를 따라 인사했다.
“어머님? 거참 웃기는 녀석이구나. 어쨌든 만나서 반가웠다.”
구미호도 단우가 싫지 않은 듯 미소를 띠며 말했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다음 장소는 어디야?”
시호가 물었다.
“이번에는 천호산에 있는 녹두군사를 처치하러 가자. 근데 섬백아, 녹두군사가 뭐야?”
단우가 말했다.
“흥! 대체 요괴에 ‘요’ 자도 모르면서 무슨 요괴를 잡겠다고 나섰는지……. 한심하군. 녹두군사는 말 그대로 녹두에서 생겨난 거야. 술법을 부리는 자가 녹두에게 술수를 건 뒤, 무덤이나 밭에 뿌리면 녹두는 녹두군사가 되지. 때로는 원귀가 된 자들의 분신일 수도 있어. 녹두군사는 누구처럼 머리는 나쁘지만 그 수가 많으면 상대하기 골치 아파지지. 멍청하긴 해도 힘은 세거든.”
단우를 쳐다보며 섬백이 말했다.
“대체 왜 그렇게 심술을 부리면서 말하는 거야?”
“내가 무슨 심술을 부렸다고 그래? 누구처럼 머리 나쁘다는 말이 찔리나 보지? 어쨌든 이 녹두군사를 없애려면 쥐가 필요해. 쥐가 녹두를 다 갉아먹어 버리거든.”
“아…… 네가 구렁이를 보면 꼼짝 못하듯이 말야?”
시호가 둘을 막아서며 말했다.
“그만 싸워. 쥐는 내가 잡아올 테니 둘은 피곤할 텐데 잠이나 자둬.”
“아냐 시호야. 너도 힘들 텐데 내가 도와줄게.”
단우가 나섰다.
“아냐. 내가 보통 사람이랑 다르다는 걸 벌써 까먹은 건 아니지?”
시호는 빙긋 웃으며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맞아. 시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지. 꼬리만 없으면 연약한 소녀 그 자체인데.”
“흥, 연약하긴 누가 연약하냐. 아마 자기 어머니처럼 피를 뚝뚝 흘리며 생고기를 뜯어 먹으며 살걸.”
“섬백! 너 대체 왜 그래? 꽈배기처럼 비비 꼬여서는. 너랑 말다툼하기 싫어.”
단우는 눈앞에 보이는 동굴로 가서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바닥에 깐 뒤 누워 잠을 청했다. 고단했는지 눕자마자 5분도 안 되어 단우는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바보. 내 마음도 모르고. 여우 계집애만 보면 자기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굴다니.”
섬백은 무심히 잘도 자는 단우의 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곤 자신의 등짐에서 옷을 꺼내 단우를 덮어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해가 떴다가 다시 져 다음날 저녁이 되었는데도 단우와 섬백은 여전히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었다. 자루 한가득 쥐를 잡아온 시호는 단우와 섬백을 흔들어 깨웠다.
“이제 그만 일어나. 천호산으로 가야지.”
시호는 단우와 섬백의 손을 잡고 천호산으로 이동했다. 단우 일행 앞에는 버섯 모양의 ‘천호성지’라고 쓰인 석상이 서 있었다.
섬백이 말했다.
“여긴 병인박해 때 천주교도들이 깊숙한 산중으로 피신해 은거했던 곳이야. 많은 사람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죽었지. 이곳엔 아마 그 사람들의 원귀가 서려 녹두군사들이 생겨났을지도 몰라.”
“그렇구나. 그런데 녹두군사는 왜 보이지 않지?”
단우가 물었다.
“평소 때엔 보이지 않아. 술법을 건 사람이 지목한 사람이 나타나야 그 모습을 드러내거든. 우린 목표물이 아니니 우리 앞에 나타나진 않을 거야. 하지만, 내가 주문을 외워 녹두군사들을 깨우면 그 모습이 보이겠지.”
섬백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깊고도 깊은 원한이 서린 원혼들이여, 그 모습을 나타내어라. 월령(月靈)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달빛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낼 지어다.”
섬백이 주문을 외자 무덤 주변에서 녹두군사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달빛에 비친 녹두군사들의 수를 세어보니 대충 백 명도 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녹두빛 얼굴에 덩치는 2미터가 넘어 보였고 손에는 시퍼렇게 날선 창과 단우의 키만 한 방패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깨운 단우 일행을 향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돌진해 왔다.
“빨리 쥐를 풀어!”
섬백이 소리치자 단우는 시호가 자신에게 건네준 자루를 풀었다. 자루 속에서 쥐들이 뛰쳐나왔고, 이내 녹두군사를 향해 달려들어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쥐떼가 지나가고 난 자리엔 녹두 빛깔의 초록색 구슬만이 남아있었다. 단우는 초록색 구슬을 집어들어 복주머니 속에 넣고선, 무덤을 향해 꾸벅 허리 굽혀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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